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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삶 이야기

고물 연필깎기

by Ajan Master_Choi 2010. 3. 9.

 

시골에 사시는 철이할머니가 손자를 보러 올라오셨다.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하여 방실방실 웃는 아기가 눈에 밝혀 수시로 올라오시곤 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잘 두고 써라."

 

비닐봉지 열어보던 철이 엄마는 얼굴을 찌뿌렸다.

봉지 안에서 나온 것은 고물 연필깎이였다.

스테인리스로 되어 표면이 잔뜩 녹이 슨 데다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구식이었다.

제대로 연필이나 깎일까 의심스러웠다.

 

"그거 아범이 어릴 때 쓰던 건데 이담에 철이 학교 들어가면 쓰라고 줘."

 

철이엄마는 시어머님의 말씀이 영 못마땅했다.

그 날 저녁 철이엄마는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고물 연필깎기를 들이 밀었다.

순간, 남편의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어린시절 다른 아이들이 연필깎이를 자랑할 때마다 몹시 부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사달라는 말조차 못꺼냈고 그런 심정을 눈치챈 어머님이 생일 날 연필깎이를 사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어머니께서 무척 아끼던 하나뿐인 금가락지를 팔아 연필깎이를 사주셨다는 걸 알았어."

 

철이아빠는 칼날이 녹슬었으면 어쩌나 조바심을 하며 연필깎이 구멍으로 염필을 밀어넣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드르륵드르륵 연필이 깎여나오자 철이아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땐 얼마나 기쁘던지, 내가 이담에 아들 낳으면 물려줄꺼야 했더니 그 말을 잊지 않고 여태 잘 보관하구 계셨구만."

 

철이엄마는 할 말을 잃고 괜시리 헝겊으로 고물 연필깎이를 문질러댔다.

철이할머니는 낡은 연필깎이와 함께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도 소중히 보관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