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Ajan Master_Choi 2021. 1. 25. 22:00

첫 문장은 한 편의 글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글을 읽을 때나 쓸 때도 마찬가지이다. 
첫 문장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선택하기도 하고 한 편의 글이 쉽게 씌여지기도 한다.
지금 이런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도 글을 쓰기에 앞서 ‘첫’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영원한 회귀는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소설의 첫 문장치고는 굉장히 난해하고 결국 작가는 처음 이 책을 접한 독자들마저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다.
체코에서 쿤데라가 집필한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세계주의적이며, 철학적이고, 조금 정치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정치적 혹은 반체제적 작가가 아니라 순수한 작가로서 보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코멘트는 광의의 철학적 테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정체성><불멸>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그를 더 이상 반체제작가로 보기엔 억지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스타일이 알랭드보통같은 젊은 작가들에게 차용되어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스타일을 선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ㅡ수평으로 잔가지를 수없이 뻗어 늘어뜨리는 나무의 다채로운 나뭇가지같은 전개도가 책장 가득 퍼지면 나는 새처럼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며 작가가 가꾸어온 생각의 열매를 채집하는...

작가가 첫머리에 니체의 영원한 회귀를 들먹인 이유는 삶의 일회성을 대비시켜 강조하려는 데 있는 듯하다.
니체는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한 회귀가 가능한 세상에서는 삶의 매 순간 순간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삶에 대해서는 가볍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그렇다고 하는 이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

 

이라고...
하지만 요즈음을 사는 우리들은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
사랑도 그렇다.
우리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네 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토마시는 다른 여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는 깃털처럼 가벼운 것으로 여기지만 테레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입각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숨겨져 있다.
반면에 테레자는 세상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매사에 비극적이기에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토마시를 위해서 가벼움을 배우고 싶었던 캐릭터로 나온다.

사비나는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정서상 가장 공감 받지 못하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배신에서 배신으로 이어지는 가벼움의 드라마가 그녀의 삶의 목표이지만 또한 그 가벼움을 참을 수 없어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가벼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위해 가정을 버리는 선택을 하지만 결국 사비나에게 버려지고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렇지만 프란츠는 의무와 책임에 짓눌렸던 삶을 살았었기에 그 후에도 여전히 사비나의 가벼움을 동경하고 결국 그녀와의 사랑을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 둘의 사랑을 무거움의 막장으로 만들어 버려 파멸하게 된다.
결국 가장 희극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네 명의 주인공 중에 나는 누구에게 가장 끌렸었던가.


이건 무거움이냐 가벼움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무거움과 가벼움이 교차하는데, 가장 극단적으로 자신 속에 이 모순이 공존했던 인물이 토마시이기에 나는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나는 사비나로서 토마시를 사랑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낀다.
나는 그래서 어쩌면 가벼움 쪽으로 저울추를 더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연애에 대한 취향은 중요한게 아닌것 같으니 각설하고, 시간이 직선으로 나아간다는 관념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근대 이전에는 아버지가 살았던 삶이 나에게 반복되고 자식에게 반복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책 속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p.463)

과연 그렇다.
사람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우리의 삶은 단 한번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의 형식은 슬픔이고 행복이 내용인 것이다.

”슬픔의 공간을 행복이 채웠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