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1937년 11월 상하이 침공을 성공적으로 끝낸 일본인들은 중화민국 수도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12월13일 도시가 함락되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잔학극을 벌였다.
수만 남성이 도시 외곽으로 끌려나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총검훈련 대상이 되었으며, 휘발유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불태워졌다.
몇달간 거리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극동군사법정 전문가들은 26만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추정했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35만 이상 난징 시민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난징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을 눕혀놓고
손을 잡게 한다면 난징~항저우까지 300km나 이어질 것이고,
그들이 흘린 피는 1200톤이라 한다.
시체는 2500량짜리 기차를 가득 채울 것이고,
쌓아올리면 74층 높이 빌딩에 달할 것이라 했다.
히틀러는 6백만 유대인을 죽였고,
스탈린은 4천만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이것은 몇년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다.
난징대학살은 단 몇 주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난징의 강간은 사망자 수뿐 아니라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참혹한 방식 때문에라도
기억되어야 한다.
중국 남성들을 총검술 연습대상으로,
그리고 일본군의 목 베기 시합의 대상으로 희생시켰다.
8만 중국여성을 강간하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내거나,
가슴을 도려내고,
산 채로 벽에 못박았다.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받았다.
산 채로 매장하기, 거세하기, 신체 장기 도려내기, 산 채로 불태우기 등이 다반사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사람을 매달아놓거나 허리까지 파묻은 후 독일산 세퍼들들 먹이로 삼는 일 등 악마적 행위가 벌어졌다.
그 광경이 너무나 역겨워 난징에 머물던 독일 나치들도 공포에 떨 정도였다.
아기를 둘로 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셋으로, 넷으로 갈랐다.
난징의 강간이 일어나고 며칠간은 그 넓은 양쯔강이 핏빛이었다.
일본인을 제외한다면 이 대학살의 참상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세상은 조용하다.
집단적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정부가 더 이상 침입자에 맞서 자국민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을 때
민중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기에
패자인 중국정부,
침략자인 일본정부,
방관자인 서구(미국과 유럽) 모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탓이다.
침략국 일본극우의 적극적 역사왜곡 시도뿐 아니라,
서양국가들이 보여준 '편의주의적 무관심',
그리고 '불편한 진실'에 대한 민중의 자세를 함께 통찰해야, 이 거대한 비극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