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 (통섭)

Ajan Master_Choi 2019. 11. 9. 16:09

 

최근 들어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 융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 가서

물리학과, 화학과, 기계 공학과, 전자 공학과 등을 찾는다면,

당신은 허탕만 치고 돌아와야만 한다.

 

현재 서울대 자연계열 학과들 목록을 보면,

전기정보 공학과, 화학생물공학부, 물리천문학부,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응용동물생명공학부 등등 40대 이상 분들에게 너무도 생소한 전공들로 즐비하다.

 

진리의 전당에서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 주지 않는 듯하다.

사실 학문의 경계는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세에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학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서는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식은 대체로 르네상스 이후 16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쪼개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을 시점으로 17세기 계몽주의가 시작되면서, 진리를 향한 항해는 본격적으로 쪼개지기 분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이 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각자 점점 더 분화하게 되고 20세기에는 수 백 종류의 학문 분야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학문을

단순하고 작게 쪼개고 분화하는 경향을 ‘환원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환원주의는 엄청난 양의 지식을 발굴해 내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인류는

그토록 열심히 찾아낸 ‘부분’들을 한데 묶어도 좀처럼 ‘전체’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환원주의의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이런 자각 하에 자연과학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통합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과학 중에서도 생물학 분야에서 통합에 가장 흥미를 보이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40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친 생물학자이다.

 

생물학계가 통합에 발 벗고 나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생물학은 그 자체가 자연과학의 가장 통합된 분야이기 때문이다.

물리학과 화학을 기저에 두고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등으로 학문을 쌓아 나가다 보면 결국 통합 생물학이 완성된다.

 

또한 생물학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과도 가장 가까운 자연과학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가장 성공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는 분야인 인지신경과학 또는 행동신경과학은 생물학과 심리학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인류학 역시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의 도움으로 최근들어 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저서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이다.

 

이처럼 심리학, 인류학과 같은 사회과학은

상당부분 생물학과 연계 되거나 큰 의미의 인문학으로 흡수되어 가고 있다.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려는 인간 지성의 위대한 과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윌슨은 주장한다.

 

이 책은 윌슨이 40년간의 하버드 생활을 마무리하며,

윌슨이 자신의 필생의 역작으로 준비한 책이다.

 

그 만큼 그의 모든 지혜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지나친 과욕으로

책 중간 중간에 너무 디테일하고 편향된 주관이 요점을 흐리게 하기도 하지만, 융합과학 분야의 고전으로 읽히기에 충분한 책인 것 같다.

 

이 책은 그리스 문명이 발생한 이오니아 지역-지금의 터키 서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서유럽문명을 꽃피우게 한 계몽사상을 거쳐 자연과학의 전체적인 과학사를 펼쳐 보이는 것으로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다음으로 생물학과 심리학의 통합으로

최근 큰 발전을 이룬 뇌과학 분야 (마음)을 소개하며 융합의 행보를 시작한다.

 

유전학에서 문화 인류학으로, 사회과학으로, 그리고 예술과 같은 인문학으로 점점 더 통합의 범위를 넓혀가며 통합의 가능성을 타진해 나간다.

 

마지막으로, 윌슨은 궁극의 목표인 윤리학과 종교까지 통합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도 인간 본성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듯하다.

 

본문의 내용을 잠시 인용해 보면,

 

인간의 마음은 신을 믿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것은 생물학을 믿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선사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실용적인 면에서 큰 이점을 제공했다.

따라서 이것은 근대의 산물로서 전개되었던,

그래서 유전자 알고리즘의 보증을 받지 못하는 생물학과는 날카롭게 대립된다.

이 두 믿음 체계 (종교와 생물학)가 실질적 차원에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진리이다.

그 결과 지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를 동시에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양자 모두를 완전하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17세기의 걸출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신성을 우주의 도처에 현존하는 하나의 초월적 실체로서 그려 냈다.

그는 신이나 자연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천명했다.

 

20세기에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우주론의 최종이론에 대한 전망을 밝히면서, 최종이론이 성취된다면 인간 이성의 궁극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 이유를

“왜냐하면 이때에야 비로소 인류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스피노자나 스티븐 호킹이나

결국 그들이 평생을 받쳐 찾았던 것은 같은 것이었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단 두가지 밖에 없다.

 

바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다.

 

자연과학자들은 물질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은 최근 들어 점점

그 경계를 인문학 쪽으로 확장하고 있다.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과업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다.

 

이 두 학문의 성공적인 만남은

결국 모든 학문의 통합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그러한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원시적인 제도는 이제 과감히 걷어내자.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초월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난한 서사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속의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 진리를 찾아가는 통섭의 과정 또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 방황하는 한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