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언덕 위의 하얀 집 - 장사상륙작전

Ajan Master_Choi 2019. 11. 7. 04:50

 

17년쯤 전 이런 저런 아이템을 치러 내던 교양 PD였던 나는 조금 특이한 소재와 만난다.

전국의 흉가 체험이었다.

인천, 제천, 대구, 영덕 등의 흉가를 무려 1박 2일 동안 돌아다니는 강행군이었다.

조연출도 없어서 조명도 카메라에 달고 대용량 배터리를 수류탄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고생길이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경북 영덕의 장사 해수욕장 근처에 있던 ‘언덕 위의 하얀 집’ (내멋대로 붙인 이름) 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없을 때라

인근에서 물어 물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인근 영덕 군민들은 열이면 열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 집에 뭐한다고 가니껴?”

 

다들 이상한 듯 쳐다보면서.

 

우리가 찾은 흉가는

바닷가 언덕 전망좋은 위치에 있었다.

원래는 횟집으로 지어진 듯,

허물어진 수족관 흔적이 보였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은

귀신쫓는다는 팥죽 자욱이 선연한 가운데

깨진 유리창과 산더미같은 쓰레기,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괴기한 분위기로 버려져 있었다.

 

헌데 좀 낭패였다.

1층에는

깔끔하게 수리된 방에

사람이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계시로

보따리 싸서 이 집에 들어왔다는,

무속인인 듯 보이나

완강히 그 호칭을 거부하며 ‘불자’를 자처하는 부부였다.

 

“이 집에 들어와서 제가 보름 전에 전기를 넣었어요. 그런데 전기공 하는 얘기가 이 집은 12년 동안 전기가 끊겨 있었대요.”

 

그러니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것이

12년은 족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다음 나오는 질문.

 

“왜 그렇게 인적이 끊겼을까? 당신은 무섭지 않은가? 여기서 귀신 본 적은 없나?”

 

그 말을 듣고서

불자 부부 중 아내가

담담하게 하는 이야기에 저는 소름이 돋고 말았다.

 

“지금 선생님 눈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 집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우리랑 함께 있어요. 저는 부처님 원력 의지하니까 괜찮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이 집이 끔찍한 집이지요. 내가 왜 사람이라고 하냐면, 정말 사람처럼 이 집을 들락거려요. 수십명 수백명이.....”

 

대체 그 ‘사람’들은 왜 이 집을 드나든답니까?

불자는 귀신들이 매우 ‘착하다’고 했다.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떼로 뭉쳐 다니는 ‘떼귀신’들이긴 하지만

해꼬지한 적은 없고 유순하다고 했다.

 

그들은 누구일까?

 

이 궁금증에는

마을 사람들이

더 그럴 듯한 대답을 주었다.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양동작전,

즉 진짜 작전을 적에게 숨기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몇 군데 해안 지역에 상륙작전이 펼쳐진 적이 있다고 했다.

문제의 흉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사 해수욕장이 그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LST에 탄 거는 국군이 아이라 학도병이었다카대. 훈련도 안받은 그 어린 아~~들이 상륙을 하다가 인민군들한테 몰살을 당했다 카더라고. 그 학도병들을 떼로 묻은 기 그 집 터라 카대. 그 언덕 전체가 묘지였다카거덩. 공사한다고 땅 팔 때 유골이 많이 나왔다 카더라고.....”

 

몇 년 전

이 장사 상륙작전과 관련된

정일권 당시 육군 참모총장 작전명령서가

복원됐다는 기사가 떴다.

육군 작전 명령 제 174호였다.

 

“육 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상륙 감행시켜 동대산(東大山/포항북부 소재)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 제1군단의 작전을 유리케 하라”

 

는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의 친필명령서이다.

놀라운 건 군사편찬위 양영조 군사연구부장의 말이다.

 

“당시 투입된 학도병을 언급한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공식 문건이다.”

 

즉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돼

죽어간 학도병들은

지금까지 ‘비공식’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꿈도 많고, 열기도 넘치고, 하고픈 것도 허다했던 그 반짝이는 나이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면서 그들은 공식적인 전사자 취급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학도병들은

무려 10시간의 사투 끝에

장사 해수욕장 근처 200고지 (언덕 위의 흉가에서 내다보이는 그 산인 것 같다)를 점거하고 1주일을 버텼다.

 

퇴각을 위해 LST가 왔지만

밧줄에 매달려 철수 작전을 벌이던 중

인민군의 박격포가 집중되자 LST 함장이 밧줄을 끊어 버렸다. 해변에는 수십 명의 학도병이 남아 울부짖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배에 올라탄 학도병들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그들을 향해 인민군이 새까맣게 죄어들어오는 모습이었다.

 

700여 명이 상륙했지만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부산으로 귀환했을 때

신성모 국방 장관이

엉겁결에 내뱉은 말을

학도병들은 평생 잊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 어떻게 살아왔니?”

 

물론 반가움이 극에 달하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신성모의 캐릭터를 아는 이로서

저 말이 그리 살갑지는 않다.

 

이 전투의 지휘관은 전성호 대령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청산리 전투에도 기여했던 사람이다.

한국의 진보들 가끔하는 대단한 착각 중의 하나가

인민군들은 독립운동가,

국군은 친일파라는 식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독립운동 와중에

좌익과 우익은 일본놈 다음으로

미운 사람들로 서로를 가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새 나라들이 선 마당에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공산당에 반대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북한을 택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성호 대령만 해도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지만

공산화된 만주를 탈출해서 남하했고

지금도 연변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좌익들이 보기에 반동분자였을테니까...

 

전성호 대령은

6.25를 최일선에서 맞은 연대장이었다.

 

1사단 12연대장으로 개성에 주둔했다가

인민군 6사단의 직격을 받았다.

인민군 6사단장은 방호산.

그리고 6사단은 중공이 북한에 고스란히 내준

조선족(당시는 이런 구분도 없었겠지만) 사단이었다.

 

함경북도 경성이 고향인 전성호처럼

방호산도 함경북도 사람이었고

아마 전성호 개인으로서는

자신이 지휘하는 1사단 병력보다 인민군 6사단쪽에

안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은 갈렸고

양쪽의 군인들은 사활을 걸고 싸워야 했다.

 

전쟁 초기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가며 싸웠던 전성호 대령은

장사 상륙작전의 지휘관으로

학도병들을 이끌고 악전고투하다가 전사한다.

 

오랫 동안 잊혀졌던,

하지만 ‘언덕 위의 하얀 집’을 흉가로 만들 정도로

사람들 기억 속 심연에 자리잡았던 전성호 대령과 학도병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 건 투혼에 감사한다.

 

특별히 빛나지도 않았고

제대로 기록조차 되지 않았던 그들이

지금이나마 어깨 한번 펴고 뿌듯한 표정 지어 보시기를 바란다.

 

다시는 그런 앳된 용사들이 나오지 않기를.

자기 고향 사람들과 싸우는 군인들이 없기를.

언덕 위의 하얀집 같은 흉가가 절대로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