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안 되네요. 역시 한 번 왔다가 끝난 거니까."
일본의 심야 다큐멘터리에서 고미 다카노리가 던진 이 한마디는 일본 격투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종합격투기 시장의 버블이 꺼졌다.
경기는 좀처럼 살아날 생각을 않는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고미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가 운영하는 체육관 "구가야마 라스칼 짐"은 관원이 없어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한다.
그는 한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 격투기 단체 프라이드의 73kg급 챔피언이었다.
베테랑 파이터로 여전히 UFC 라이트급에서 뛰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닥친 현실은 차갑다.
초라한 말년이다.
◆ 장기 불황, 잃어버린 10년, 일본 체육관 사업의 몰락
2007년 프라이드가 문을 닫은 후 10년, 일본 격투기 업계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다.
생각보다 길어진 장기 불황은 일본 종합격투기 버블 시대에 유행처럼 번졌던 체육관 사업 분야에 큰 타격을 입혔다.
확장성만이 돋보인 시장은 위험하다.
버블 시대 이후 폐관을 선언한 종합격투기 체육관만 수십 곳이다.
불황의 그늘은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선수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사쿠라바 가즈시의 래프터7,
추성훈의 클라우드 아키야마 도장,
사카구치 세이지의 사카구치 도장 등이 폐관했다.
사쿠라바, 추성훈, 사카구치는 일본에서 이름값이 매우 높은 인물들인데도 말이다.
한때 체육관 사업의 본보기라 불리던 요시다 도장, U-파일 캠프도 상황은 같다.
일본 전역에 8개 지부을 가지고 있던 요시다 히데히코의 요시다 도장은 현재 도쿄 총본부도장을 제외한 모든 지부도장이 폐관한 상태다.
다무라 기요시의 U-파일 캠프는 버블 시대에 5개의 지점과 1개의 소규모 격투기 경기장(니시초후 아레나)까지 열며 승승장구했는데 지금 U-파일 캠프는 단 하나의 지부만이 힘겹게 운영되고 있다.
종합격투기 체육관이 줄어들었다.
이건 파이터들이 쾌적하게 훈련할 수 있는 장소가 줄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체육관에 투자하려는 회사가 줄어들다 보니 시설이 낙후됐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스포츠라 불리는 종합격투기의 특성상 이 문제는 치명적이다.
체육관이 적어지고 시설이 낙후되다보니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본은 전문적인 헤드 코치가 많지 않다.
UFC에 맞는 전략을 지시하는 세컨드를 찾기 힘들다.
UFC 플라이급 파이터 호리구치 교지는 '헤드 코치의 유무'를 미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꼽았다.
종합격투기 저널리스트 대니얼 허버트슨은 후쿠다 리키의 선수 생활을 빗대 현 일본 격투기 시장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2012년 2월 UFC 144에서 스티브 캔트웰과 대결했던 후쿠다는 당시 7개의 체육관을 돌며 연습했다고 한다.
"제가 UFC에서 뛰고 있으니 돈이 많은 줄 알지만, 전 돈이 없습니다."
현재 UFC 플라이급 랭킹 4위에 올라있는 호리구치 교지는 부정할 수 없는 아시아 최강 파이터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미 UFC 타이틀전까지 치렀다.
하지만 죽어 버린 시장에서 스폰서 영업, 체육관 사업을 시작하긴 여전히 어렵다.
그가 기댈 수 있는 건 파이트머니 뿐이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일본을 떠나 북미에서 훈련하는 시간을 대폭 늘렸다.
옥타곤에서 활약해 미국의 스폰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좀 활약하려고 하니 일본 격투기 붐이 갑자기 끝났다."
◆ UFC도 살리지 못한 버블의 한파, UFC 일본 대회 중단
올해 UFC 일본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UFC의 일본 마케팅을 맡고 있던 거대 광고 기업 덴츠(DENTSU)가 'UFC 재팬' 사업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UFC 일본 방영을 맡고 있던 케이블 방송국 'WOWOW'가 UFC와의 계약 연장을 포기했다.
해마다 관객 동원 성적은 떨어졌다.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자랑하는 기업이 마케팅을 맡아도 격투기 열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UFC 아시아 지사장 켄 버거의 지휘 아래 지상파 방송국 텔레비전 도쿄와 일본판 TUF인 '로드 투 옥타곤: UFC 재팬'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UFC JAPAN 관객 동원 수치
UFC JAPAN 2012: 21000명(프랭키 에드가 vs. 벤 헨더슨 라이트급 타이틀전)
UFC JAPAN 2013: 14682명(반더레이 실바 vs. 브라이언 스탠)
UFC JAPAN 2014: 12395명(마크 헌트 vs. 로이 넬슨)
UFC JAPAN 2015: 10137명(조쉬 바넷 vs. 로이 넬슨)
UFC JAPAN 2016: 개최 예정 없음
설상가상으로 올해 UFC 아시아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얼어붙어 있던 일본 격투기 업계는 더욱 시리다.
UFC 일본 대회가 열리지 않은 건 2012년 UFC가 일본 시장 부활을 선언한 이후 5년 만이다.
"버블이었으니까요."
K-1 MAX가 낳은 최고의 스타 마사토는 일본 격투기의 버블 시대를 가장 잘 체감한 파이터다.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 K-1 맥스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한 경기에 현금 5000만 엔(약 5억 5,000만 원)을 받은 것이 자신의 파이트머니 최고액이었다고 말한다.
토너먼트 우승 상금을 제외한 순수 파이트머니 얘기다.
"격투 버블이었으니까요. 섣달 그믐날(12월 31일) 지상파 방송사 3곳에서 격투기를 중계했으니까"
그는 덤덤하게 말한다.
마사토는 버블이 가장 최고조에 이를 때 활동했고, 버블이 급격히 사라지는 순간에 은퇴했다.
은퇴 후 마사토는 체육관 사업의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실부터 다졌다.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곳,
사람들이 찾는 곳,
지금 실버 울프 체육관은 그런 곳으로 통한다.
은퇴 이후 방송 활동을 착실히 준비했다.
그는 이제 어엿한 예능인이자 배우다.
일본은 20년 전,
종합격투기,
입식타격기,
브라질리언 주짓수 광풍을 맞았다.
텔레비전을 틀면 격투기가 나오던 때다.
예능 프로그램이 격투기 선수를 섭외하려고 전쟁을 벌였다.
시청률이 나왔다.
상품이 팔렸다.
인기가 있었다.
당연히 돈이 됐다.
돈이 되니 단체가 난립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격투기 단체를 만들었다.
무분별한 카드가 넘쳐났다.
대중은 자극이란 것에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대회사는 몬스터 매치를 벌였다.
연예인을 동원했다.
시청률은 더욱 높아져갔다.
자연스레 체육관 사업이 흥했다.
나도 해볼까하는 심리로 이 사람, 저 사람 모두가 체육관을 열었다.
현재 지금 우리나라 처럼 말이다.
이 흐름이 영원할 줄 알았겠지...
한바탕 축제를 벌인 일본에 지금 남은 건 파산의 노년 뿐이다.
한때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앞다퉈 중계권을 따내고, 대회장을 만원 관객으로 채우던 그 화려한 '황금시대'.
동네마다 체육관이 있고, 인터넷에 격투기 얘기가 넘치던 그때는, 일본 격투기 업계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다가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 갑자기 사그라졌다.
지금 우리도 그들의 뒤를 밟아가고 있다.
그래서 조용히 외쳐본다.
"무술은 무술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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