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이자 한·일 수교 50주년인 올해, 일본은 임나일본부설(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을 교과서에 포함하며 다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의 분노는 크다. 고대사 왜곡일 뿐만 아니라 독도 영유권, 위안부 불인정 등 일본의 후안무치한 행태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점도 있다. 우리는 식민지배의 그늘을 일소했을까. 한국 사학계는 아직도 조선총독부가 우리 백성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했던 역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교과서에서 사라졌던 '단군신화'라는 용어가 되살아났다. 지난해에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세금 10억원을 들인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 고대사 속 한나라 영토)'라는 제목의 책을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이름으로 출판해 논란이 됐다.
조선총독부의 주장대로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국내 교육으로 부족하니 '우리는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것인지 한심할 지경이다.
이처럼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식민사학의 뿌리는 어디일까.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한국·일본의 동화를 위해 시작된 역사왜곡의 시작을 파헤쳐 본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한 '조선반도사' 편찬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政毅)는 부임하자마자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역사왜곡에 착수해 한국의 역사책 수거와 새로운 역사서 편찬 사업을 추진했다.
데라우치는 "조선인은 독서와 문장에 있어서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고래로부터 전해지는 사서가 많은데, 이는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이것들을 읽으면 독립국 시절의 옛꿈에 연연케 하는 폐단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사적들을 모두 없애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격려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니 차라리 과거 역사책을 못 보게 막는 대신에 새로운 논리로 따른 사서를 만드는 것이 첩경이며 그 효과가 클 것"이라고 밝혔다.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1922년 교육시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要訣·가장 중요한 방법)인 것이다."
한국사 왜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결과를 의도했는지를 보여주는 말들이다.
방향이 정해지자 행동에 나섰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조선의 구습과 제도조사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샅샅이 뒤져 역사서적들을 불온서적으로 몰아 거둬들였다.
고대조선 관련 서적,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 등 51종 20여만권 이상을 압수해 일부만 남기고 불태웠다.
이어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이 시작됐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원래 동족이며, 한국은 주체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미개발 상태로 있다가 일본의 혜택으로 비로소 발전하게 됐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한민족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고유의 사화(史話), 설화(說話) 등은 일절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지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고대조선을 말살하고, 위만조선-한사군 때 중국의 지배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및 가라시대'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일본의 보증시대'라는 부제까지 붙이며 '임나일본부'(고대 일본이 한국 지배를 위한 한반도 남부에 설치했다는 기구)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켰다. 하지만 작업은 1919년 3·1운동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사 말살에 나서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됐다. 위원장은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았고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등이 고문으로 참여했다.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일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921년 박사학위를 받은 당시의 젊은 학자로 고대사 분야 수사관을 맡아 한국 고대사 왜곡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1926∼1932 경성제대·교토대학 겸임교수를 지냈다. 나가노 칸(長野幹), 오다 미키지로(小田幹治郞) 등도 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으로는 정만조, 유맹, 어윤적, 이능화 등이 위촉됐다. 도쿄대학 교수로 우리 역사 왜곡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등은 지도고문이었다.
이듬해 1월 총독과 정무총감이 입회하고 구로이타가 주도한 1차 위원회에서 조선반도사에 적용할 시대 구분이 만들어 졌다. '제1편 삼국 이전', '제2편 삼국시대', '제3편 신라시대', '제4편 고려시대', '제5편 조선시대 전기', '제6편 조선시대 중기', '제7편 조선시대 후기'로 정했다. 한국사의 뿌리인 고대사를 '삼국이전'으로 뭉뚱그려 고대조선을 부정하려 한 것이 눈에 띈다. 다음과 같은 위원들 간의 논의가 이를 잘 말해준다.
정만조 : "삼국 이전이라 함은 단군(고대조선)까지를 넣는 것인가?"
구로이타 : "삼국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더 연구하겠다."
이능화 : "상대(上代) 조선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있다. 그러므로 삼국 이전의 조선을 고대조선으로 고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구로이타 : "그 당시의 조선은 현재의 조선과 지역이 다르므로 차라리 삼국 이전이라는 막연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까 한다."
◆한국사 왜곡의 결정판 '조선사' 편찬
1925년 사이토는 조선사편찬위원회 사업이 조선인의 비협조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사편수회'로 확대 개편했다.
편수회는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 관청이었고, 사무소는 총독부 중추원에 두었다. 협박과 회유를 통해 역사학자들을 영입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1925년 8월 1일 열린 제1차 위원회에서 사이토는 조선사 편찬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광범위한 사료 수집을 독려했다. 또 전국 도·군·경찰서에 적극적인 협력을 지시했다. 주목을 끄는 것은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시대 구분을 조정했다는 점이다.
삼국 이전과 삼국시대를 묶어서 제1편을 신라통일 이전으로 했고, 제2편을 통일신라시대, 제3편을 고려시대, 제4·5·6편을 조선시대 전기·중기·후기로 각각 편성했다.
'삼국 이전'과 '삼국시대'를 '신라통일 이전'으로 묶은 것은 한국 고대사 상한 연대를 더 끌어내려 종래 일본 역사학계가 주장했던 대로 한국 고대국가 출발을 3∼4세기에 맞추려는 의도였다.
이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 말하기 어려웠던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만들려 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일본 고전 연구와 광개토대왕 비문 연구, 칠지도 명문 연구 등을 통해서 이러한 주장을 이미 통설로 만들어놓고 있었으나 한국 문헌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자기네들의 입맛대로 조작할 사료집 '조선사'를 편찬해 고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굳히기로 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결코 침략행위가 아닌 역사 복원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계산이었다.
이를 위해 이른바 '첫 번째 일왕' 진무(神武·기원전 660년)보다도 1673년이나 앞서 있는 단군왕검의 고대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을 부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단군의 건국 기록을 신화로 왜곡하는 것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는 한국인, 일본인 모두 역사 지식이 많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일본의 정치 이념에 의해 설계된 각본에 따라 새로운 허구의 역사를 만드는 작업이 가능했다. 영토 지배뿐 아니라 민족 동화까지 노린 이런 시도의 결정판이 '조선사' 편찬 사업이었던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1937년 '조선사' 35권과 부록으로 '조선사료 총간' 20종, '조선사료 집진' 3질을 완성하고 이듬해 3월 편수사업을 끝냈다.
이마니시 류를 비롯하여 이바나 이와키치(稻葉岩吉),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본 학자들이 편찬 실무를 맡았고, 한국인 학자로 1922년에 위촉된 고문 4명, 위원 4명을 비롯하여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홍희, 구찬서 등이 동참했다.
16년간 90여만엔의 예산을 들여 출판한 '조선사'는 정치·문화적으로는 타율성(他律性), 사회·경제적으로는 정체성(停滯性)에 입각해 서술한 악서(惡書)로 역사적 진실을 심하게 왜곡하여 한국인의 옛모습을 바르게 비쳐볼 수 없게 만든 책이다.
중국 남송(南宋) 시대의 '우공구주 금주도'(禹貢九州今州圖·1209년). '고조선', '고려'(고구려), '동이', '백제', '신라' 등의 명칭을 만주지역과 한반도 일대에 적어 두었다. 일제의 주장과 달리 오래전부터 고조선이 역사적 실재로 인정됐고,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 운운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허위임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된다.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상통하는 식민사관
일제는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왕의 신민'으로 만들려 했다. '조선사'가 고대조선사를 부정하고,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의 한국사 왜곡은 핵심 주장을 6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가운데 끼어 있어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둘째, 한국민족사는 중국으로부터 유래한 기자와 위만, 그리고 한사군의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
셋째, 고대 한·중 국경선인 패수는 대동강이며 한사군의 중심이었던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넷째, 고대조선사는 역사를 끌어올리기 위해 가공된 허구의 역사요, 신화일 뿐이다.
다섯째, 한민족은 천성적으로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당파성이 강하다.
여섯째, 한반도의 남부는 임나일본부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지배는 침략이 아닌 역사의 복원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주장은 고대조선, 고구려, 발해가 자기들의 지방정부였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광복 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이병도, 신석호의 학설이 소위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역사학의 주류가 되어 한국 역사학계를 풍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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